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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운한각) 正殿(雲漢閣)
운한각은 정조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건물이다. 중앙에는 정조 어진을 모신 합자閤子를 두고, 좌우에 있는 익실에는 정조가 편찬한 책과 제사에 쓰는 물품을 보관했다. 보통 어진을 모시는 공간은 화려하게 치장하지만 검소한 생활을 강조한 정조의 뜻을 받들어 소박하게 만들고, 학문을 좋아하던 왕을 기리기 위해 익실에 서책을 봉안한 것이다. 이런 사례는 다른 영전에서는 보기 어렵다. 합자와 익실 바닥에는 온돌을 설치하여 5일마다 불을 넣어 습기를 제거했다. 고종 9년(1872)에 운한각 바닥을 마루로 개조하였지만 아궁이 흔적이 남아 있다.<br /> 순조는 1804년에 처음 화령전에 와서 작헌례를 올렸다. 이때 건물 이름을 운한각雲漢閣이라 짓고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써서 내렸다. 운한은 많은 서적을 탐구한 학자를 지칭하는 ‘운한소회雲漢昭回’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정조를 상징하는 말로도 종종 쓰였다.<br /> 현재 운한각에 봉안되어 있는 어진은 2004년에 다시 그린 표준영정이다. 원래 모셔져 있던 정조 어진은 1908년에 서울로 옮겨졌으나 1954년 부산 피난처에서 소실되고 말았다.
VIEW MORE이안청·복도각 移安廳·複道閣
이안청은 어진을 임시로 보관하는 건물이다. 정전인 운한각을 수리하거나 변고가 생겼을 때 어진과 서책 등 기물을 옮겨 보관하기 위해 이안청을 만들었다. 복도각은 정전과 이안청을 잇는 행각이다. 정전 곁에 이안청을 두는 것은 어진을 모시는 영전 건축물에서 일반적이지만 정전과 이안청을 복도각으로 연결한 방식은 화령전에서만 볼 수 있다. 화령전은 조선 시대 영전 건축물에서 복도각이 적용된 최초의 사례이자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유일한 사례다.
VIEW MORE재실 齋室
재실은 제사를 주관하는 헌관이 머물며 준비하는 건물이다. 국왕이 직접 제사를 지낼 때면 어재실御齋室로 쓰였다. 재실에서 정전 앞까지 임금이 지나가는 길인 어로와 잠시 대기하는 장소인 판위版位가 설치되어 있다.<br /> 1908년에 정조 어진을 서울로 옮긴 뒤 비어 있는 화령전 건물을 수원의 풍화당風化堂 어른들에게 관리하도록 했는데, 그 이후로 풍화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풍화당은 일종의 기로소耆老所로 지금의 경로당과 유사한 친목 기구이다.
VIEW MORE향대청·전사청 香大廳·典祀廳
향대청은 제사에 사용하는 향을 보관하는 건물이고, 전사청은 제례에 올릴 그릇이나 깔개 등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고 준비하는 건물이다. 전면에 두 개의 출입문이 있다. 넓은 문은 향문香門으로 향대청에 보관한 향을 정전으로 가져갈 때 쓰고, 좁은 문은 전사청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출입문으로 썼다. 1999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건물터를 확인하고 2005년에 복원했다.
VIEW MORE어정 御井
어정은 화령전 제사에 사용하는 물을 길어 올리는 우물로 깊이는 약 5.4m이다. 일반적으로 왕실 사당에는 별도로 우물을 만들어서 정결한 물을 사용했다. 화령전 어정은 화강석으로 정교하게 다듬은 형태로 물이 흘러넘치는 통로까지도 정성스럽게 꾸며져 있다. 1908년에 정조 어진을 서울로 옮긴 후 화령전 관리가 소홀해지면서 사라졌다. 2000년에 시행된 발굴 조사를 통해 2005년에 어정을 복원했다.
VIEW MORE유여택(維與宅)
유여택은 수원읍을 옮긴 이듬해인 조선 정조 14년(1790)에 지은 건물로, 화성 축성을 시작하던 1794년 가을에 증축되었다. 처음 건물은 은약헌隱若軒으로 부르다가 증축 후 이름을 바꾸었다. 유여택이란 <시경>에서 주나라의 기산岐山을 가리켜 ‘하늘이 산을 만들고 주시어 거처하게 하였다此維與宅’라는 고사를 인용해서 지은 이름이다. 정조는 유여택에서 신하들의 보고를 받고 과거 시험에 합격한 무사들에게 상을 내리기도 했다.<br /> 1800년 정조가 승하한 뒤에는 화령전이 완성되기 전까지 현륭원 재실과 창덕궁 주합루에 있던 정조의 초상화를 모시는 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br /> 처음 지은 은약헌의 북쪽 1칸은 공신루拱宸樓라는 누마루였는데 증축하면서 실내에 온돌을 놓고 창호를 달았다. 현재 창호는 복원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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