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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효를 위한 또 하나의 수도首都 '수원화성'
수원은 효원의 도시로 불립니다. 조선시대 위민군주 정조의 효심이 깊이 담겨 있는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수원화성을 정조의 효심이 담긴 결정체로 보기도 합니다. 정조 효의 결정체라고 하는 것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당시 수원도호부(현재 화성시 태안면 안녕리) 관아가 있는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수원 팔달산 일대로 천도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조의 효는 약간 문제가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개인적인 효도로 인해 국가의 엄청난 예산을 들여 수도를 옮기려고 한 것은 현재적 관점만이 아니라 200여 년 전의 관점으로 보아도 절대 옳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수원을 효원의 도시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정조가 진짜 수원으로 천도를 하려고 한 것일까요? 이 두 가지가 과연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 이 문제의 진실을 들여다 봅시다. 이 내용은 2018년 인인화락 가을호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VIEW MORE'화성성역의궤' 도설(圖說) 속 그림과 수원화성
한반도에는 2천 개가 넘는 성곽이 존재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수원화성은 가장 뛰어난 성곽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대왕이 남긴 찬란한 우리 문화유산입니다. 축성이 끝난 후 정조는 수원화성 축성의 모든 내용이 담긴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를 편찬하도록 명했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기록된 『화성성역의궤』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에 그려진 화성 시설물의 그림과 설명은 이후 보수와 복원에 적극 활용되었으며 지금까지도 복원사업에 가장 필요한 자료로 활용됩니다. 이는 훗날의 본보기로 삼고 후손들이 참고할 것을 예측했던 정조의 혜안이었습니다. 2017년 인인화락 가을호에 소개된 화성성역의궤 도설 속 그림과 수원화성에 대한 내용입니다.
VIEW MORE화성원행도로 보는 1795년 그때 그 순간
즉위 초만 하더라도 수차례의 암살 기도에 내몰리기도 했던 정조 임금이 즉위 20주년을 맞아 보란 듯이 7천 명에 가까운 행렬을 거느리고 생부인 사도세자(정조 즉위 후 장헌세자로 추존함)가 묻혀 있던 화성을 찾는 길이었다.<br /> 1795년은 동갑내기이던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는 뜻 깊은 해였다. 정조는 생부의 원소가 있던 이곳 화성에서 어머니 혜경궁을 위한 성대한 잔치를 계획하였다. 33년 만에 어머니에게 남편의 무덤을 참배하게 하고 어머니 집안의 친인척들을 모아 회갑연을 베푸는 것이었다. 마침 한 해 전부터 건설에 들어가 위용을 드러낸 화성의 모습을 내외에 과시하기에도 안성맞춤인 때였다.<br /> 직접 어머니를 모시고 가는 행차인 만큼 그 준비도 철저했다. 화성 건설 대역사를 총괄하던 총리대신 체제공을 비롯하여 정조의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주축을 이룬 정리소를 전담부서로 설치하여 행사를 관장하게 했다. 한강에는 배다리(舟橋)를 건설하고 혜경궁이 타고 갈 가교(駕轎)도 새로이 제작했다. 무엇보다 뜻깊은 것은 이 행사가 철저하게 백성과 함께 하겠다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 위에서 기획되었다는 점이다. 예산의 집행과 행사 기획 곳곳에 정조 임금이 특별 지시한 여민동락의 정신이 구현되었다. 왕권의 강화가 자신을 괴롭히던 신권을 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함께 하기 위한 것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어심이 그대로 드러난 쾌거였던 것이다.
VIEW MORE수원화성 시설의 특징
수원화성은 기존 성들이 안고 있었던 모든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건설된다. 동서남북 사대문을 건설하면서 모두 옹성을 설치하였고, 적재적소에 치성을 두었으며, 여장의 높이를 높여 군사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이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밝힌 조선 성들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요소요소에 암문을 설치하여 비상 사태에 대비하였고, 남북 수문을 두었는가 하면, 군사적인 위엄을 담은 장대를 동서에 건설했다. 치성(雉城)의 제도는 참으로 중요하다. 치성은 성벽을 중간중간 돌출시켜 쌓은 것을 말하는데 꿩이 제 몸은 감추고 남을 잘 공격하는 습성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러한 치성이 없거나 적당한 장소에 있지 않으면 적군들이 성벽을 기어오르거나 파괴하기 쉽다. 과거의 성들에도 치성이 있지만 그 활용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었다. 수원화성에 건설된 치성들은 다각도로 모색되었다. 순수하게 치성의 역할만으로 건설되기도 하고, 대포를 장치하는 포루(砲樓)를 겸하거나, 치성 위에 집을 지어 군사를 보호하려고 한 포루(鋪樓)도 있다. 성의 동남쪽, 서남쪽, 서북쪽, 동북쪽에는 모두 각루(角樓)를 두었다. 이는 수원화성의 다섯 군영 체제를 보완하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화성행궁에 중영(中營)(신풍위;新風衛)을 두고 동에는 창룡위(蒼龍衛), 서에는 화서위(華西衛), 남에는 팔달위(八達衛), 북에는 장안위(長安衛)를 두었는데, 중간의 요소에 네 각루를 두어 각 위(衛)를 보충해주는 동시에 부장(副將)이 지휘하는 지휘소의 역할도 한다. 각 각루의 위치는 빼어난 경관을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어 휴식 공간으로써의 역할도 컸다고 보여진다. 그 중 제일은 동북각루인데 용두각으로 불리기도 하는 방화수류정이다. 조선 후기에 건립된 정자 중에서는 가장 아름답다고 할만한 정자인데 동북각루라는 집 이름이 말해주듯 군사적인 목적에 의해 세워진 시설이다. 적군이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빠져 있을 때, 마루 밑의 총구와 포구에서는 사정없이 불을 뿜을 것이다. 수원화성 봉돈(烽墩)은 단순한 봉수대의 역할을 뛰어넘은 요새다. 우선 봉돈 자체가 하나의 치성으로 쓰이며, 많은 총구를 뚫어 자체 방어력을 갖추었으며, 화성행궁과 서장대를 마주보며 국경과 해안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수원화성의 건설에서 벽돌의 사용은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북학파 실학자들의 의견에 따라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벽돌집의 제도를 조선에 이식시키는 과정이 수원화성에 담겨 있다. 성의 중요 시설물은 대개 벽돌을 활용하였고, 건축물의 일부분도 벽돌로 쌓았다. 그래서 수원화성을 축성 재료로 분류할 때 다른 곳에는 없는 석전교축(石塼交築)의 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수원화성의 평면은 나뭇잎을 닮았다. 땅의 생김새에 따라 순응하며 성을 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조의 애민정신에 의한 성의 확장으로 인해 더욱 완벽하게 나뭇잎을 닮았다. 수원화성은 여러 기능들을 한 시설물에 복합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이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다기능을 강조하면 외형을 놓치게 되고, 외형을 강조하다 보면 기능성에 문제가 있게 된다. 이 배반적인 요소 둘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힘은 문화적인 능력이 탁월했을 때 가능하고, 탁월한 문화적 능력은 튼튼한 철학이 바탕에 깔려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수원화성은 이렇듯 조선의 정점에서 건설된 것이다.
VIEW MORE백성을 위한 수원화성
수원화성에는 국왕의 애민정신이 가득 담겨 있다. 설계를 변경해가면서까지 주민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과 공역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점, 그리고 척서단. 제중단 등의 환약을 내려주고, 무더위와 인건비 미지급으로 인한 공사의 일시 중지 등은 애민정신의 소산이다.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새수원의 건설 계획에는 성의 축조가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수원이 화성유수부로 승격되고 성을 쌓으려고 보니 많은 민가들이 성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축성의 책임자들이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고 있을 때, 정조는 성을 세 번 구부렸다 폈다 해서라도 모두 수용하라는 비답을 내린다. 성을 확장한다는 것은 국고의 손실을 가중시키는 것이다. 이는 곧 국고의 손실보다 수원 주민을 우선했다는 말이다. 무더위가 극성을 부릴 때 정조는 화성 성역에 참여하고 있는 공역자들의 노고를 생각해서 척서단을 지어 하사한다. 더위 먹은 데 먹는 환약을 특별히 지어 내려준 것이다. 약을 지급 받은 사람들은 약의 효능보다 국왕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 더 큰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감동은 곧 최고의 성을 건설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VIEW MORE성역관리와 공사경영
수원화성의 건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관리와 경영의 능력이다. 오백 칸이 넘는 화성행궁을 건설하면서 십리에 이르는 성을 축조했다는 것은, 더구나 28개월 만에 마무리 지었다는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국왕의 명령이 아무리 지엄하다 해도 공사를 수행할 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당대의 기술력과 관리. 경영 능력이 최고조에 달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금전 관리를 엄격히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일당으로 인건비를 주는 경우와 일의 성과에 의해 돈을 주는 성과급제를 병행하였다. 혹시라도 빈틈으로 경비가 빠져나가는 것을 예방하고 작업을 독려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욕심이 배제된 경영과 관리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하게 취급된다. 또 개인의 욕심이 끼어 들 틈이 보이는 것은 체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깨끗한 경영과 엄격한 관리로 쌓았기 때문에 수원화성은 짧은 시간에 완벽하게 건설될 수 있었던 것이다.
VIEW MORE거중기
조선후기 정조시대에 왕의 명령아래, 수원화성을 쌓으려면 엄청난 길이에 과학기계를 이용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동이 편리하고, 능률적이고, 효율적인 기기가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고안한 것이 거중기이다.
VIEW MORE철저한 임금지급
옛날 국가나 지방관청에서 시행하는 공사에는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했을 뿐만 아니라 임금도 지불하지 않고 혹독하게 일을 부려먹어 많은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특히 탐관오리들은 가난하고 힘 없는 백성들을 강제부역으로 가혹하게 착취 했기 때문에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정조대왕이 명하여 공사에 들어간 화성 축성 때는 이런 일들이 결단코 없었다. 또박또박 임금을 지불했을 뿐 아니라 임금님의 인부들에 대한 관심이 각별해 수시로 상품을 지급하고 잔치를 열어줬으며 더운 여름에는 몸을 보호하는 척서단이란 약을 직접 조제해 내려주기까지 했다. 따라서 기록에 보면 화성 공사 및 수원 신도시 조성공사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전국의 백성들 때문에 너무 많은 사람이 수원에 오지 못하도록 하라는 임금의 특명이 각 지방관들에게 하달될 정도였다.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백성을 징발해 노동에 종사케 하는 것을 부역(賦役) 노동이라고 하는데,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는 부역노동을 하는 대신 현물로 대납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화성 축성공사가 시작되면서 채제공 역시 지금까지의 관례를 들어 부역을 주장했다.
VIEW MORE공사실명제 구현
수원화성의 건설은 완벽한 실명제로 완성된다. 성역의 처음과 끝을 모두 기록한 공사보고서를 펴낸 것이다. 국가의 재정이 많이 들어갔고 백성의 피땀 어린 정성이 훌륭한 결과를 낳았으므로 보고서의 간행은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수원화성의 성역이 한창 진행되던 정조19년(1795) 윤 2월에 수원에서는 커다란 잔치가 열렸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가 열렸던 것이다. 수원화성에 대한 정조의 애착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이 잔치의 모든 것을 책으로 펴냈는데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라는 책이다. 이 책의 간행에 앞서 정조는 국가의 모든 행사를 낱낱이 정리해 놓을 요량으로 정리의궤청을 설치하였었다.<br />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간행은 화성성역 공사보고서의 간행에 본보기가 되었다.<br />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고 제목을 단 이 책에는 공사의 논의 과정과 관청 사이에 주고 받은 공문서, 임금의 의견과 명령 등 진행 과정을 기록했고, 공사 참여자의 이름과 공역 일수, 각 시설물의 위치와 모습 및 비용들을 낱낱이 실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그림을 그려서 이해를 돕기도 했다. 공사비에 대한 대목에서는 각 공역에 들어간 경비를 산출하였고, 인건비(일당)와 공사에 참여한 일수 등도 상세하게 기록해서 석공 아무개가 어느 고장의 출신이며, 어느 현장에서 몇 일을 일했으며 얼마의 돈을 품값을 받았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어느 시설물이든지 건축 자재를 하나하나 기록했고, 그 비용을 산출했으며 성 안팎에서 본 그림을 따로 그려 이해를 도왔는데 부득이한 경우엔 실내의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기계들은 부품까지 따로 그려서 설명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이 공사보고서가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이다. 지난 70년대 수원화성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분적인 보수를 해오고 있다. 그럴 때마다 화성성역의궤가 교과서로 등장하는 것은 기본이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에도 화성성역의궤는 한몫을 톡톡히 했다. 200여년 전의 완벽한 공사보고서에 세계가 놀란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에 들어 있는 실명제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현장에서도 그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br /> 창룡문과 화서문, 그리고 팔달문에서 실명판을 볼 수 있는데 화서문 것은 마모가 심해서 눈을 씻고 들여다 봐야 볼 수 있지만, 창룡문과 팔달문의 실명판은 선명하게 보인다. 그중에서 팔달문 것은 마치 어제 새긴 듯 글씨가 살아 있다. 최근에 일어난 부실 공사들과 비교해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자신이 없으면 기록을 제대로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의 건설 과정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은 곧, 정조를 비롯한 당시 정치가들의 자신감 있는 국정 수행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러면 그 당당한 자신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이는 당연히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기본으로 깔려 있을 때만이 가능한 일 일것이다.
VIEW MORE수원화성 축성 시 물자조달
조선왕조 창업 초 수도를 한양으로 정한 뒤 궁궐과 각종 관아, 성곽을 조성 한 공사 이후, 화성 신도시 건설과 화성 축성은 조선시대 최대의 국가적 대 역사(大役事)였다. 따라서 화성을 축성할 때 각종 물자가 엄청나게 많이 쓰여졌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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